구급함

우리는 흔히 대화교육이라고 하면 발음, 어휘, 문법, 원어민 회화, 토익 스피킹시험 준비 등을 연상할 뿐이다. 그만한 수준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서로에게 소중한 삶의 자원인 대화가 고립과 불통의 원인이자 결과가 됐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신동일 교수의 신간 '모두를 위한 대화감수성 수업'(크레타 펴냄)은 합리주의, 경제주의, 기술주의 사회에서 왜 대화가 심각하게 훼손됐는지 진단한다. 또한 대화교육의 관행을 비판하고, 의미협상, 상호존중, 자기배려가 사라진 현실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저자는 "대화다운 대화가 소멸하고 있다"며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색하며, 대화의 가치를 복원할 방안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언어감수성 중에서도 대화감수성, 혹은 대화문해력을 키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제임을 주장한다. 대학 안팎에서 학생 및 직장인과 꾸준히 소통해 오고 있는 저자는 기존의 대화교육이 지극히 기능적이고 표준적임을 지적하며, 삶의 기술로서의 대화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대화는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지 않으며 협력과 상호 존중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런 사례로 유아부터 성인까지 일상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화기술을 소개한다.

또한 AI 시대의 언어감수성과 지속 가능한 언어교육의 방향도 함께 제시한다. 멀티링구얼, 바이링구얼, 트랜스링구얼, 링구아 프랑카 등 새로운 언어사용 환경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공공재가 될 수 있는 대화교육의 조건과 가능성도 모색한다. 복잡한 학술개념을 쉽게 풀고, 다양한 미디어와 실제 사례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도운 '모두를 위한 대화감수성 수업'은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대화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루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피카츄 등 인간의 형태가 아닌 캐릭터는 "I am Groot" "삐까" 등 제한된 어휘와 발성으로 일상적인 대화에 자연스럽게 참여한다. 또 가정에서 함께 지내는 반려동물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산책 갈까" "손" 등과 같은 어휘나 문장 정보를 제한적으로 주고받지만,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말 차례를 교환하고 의미협상을 일상적으로 나누곤 한다. 이처럼 말 차례가 균형적이지 않아도, 서로의 언어를 정확하게 몰라도 서로가 위협적이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고 사용하는 대화의 모양은 어떠한가? 우리 모두 경험한 수능 영어과목 듣기평가, 토익 대화 지문, 오픽 스피킹 시험의 대화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대화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깔끔하다. 실제 대화처럼 보이지도 않고 마치 꽁꽁 얼어붙은 냉동식품과 같은 모습을 띤다.

우리는 표준과 규범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대화가 왜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인지 잊어버리고 있다.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려고 수업을 들었지만 정형화된 대화만 배웠다. 직장에서는 글로벌 시대라며 영어공용화를 도입했지만 직원의 영어능력이나 대화능력을 수량화된 시험 점수로만 판단하고 관리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관행은 커뮤니케이션의 맥도날드화, 즉 '맥커뮤니케이션' 문화만 양산했을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맥도날드는 세계 어디서나 표준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된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에 갇힌 채 살은 없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대화만 할 뿐이다.

대화는 단순한 언어 능력이 아니라 구급함 다양한 자원을 활용해 의미를 채우고 편집하는 과정이다. BTS 멤버 정국이 미국 토크쇼에 나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하는 모습이나 다양한 국가, 인종이 섞인 축구 리그에서 복수의 언어로 소통하는 한국 선수들의 대화가 좋은 예다.

결국 대화는 문장을 문법적으로 완벽하게 조합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원을 활용해 함께 의미를 만들고 협상하는 과정이다. 제한된 상황과 불완전한 문장이라도 진심이 담긴 말하기는 깊은 상호작용과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얼어붙은 대화를 녹이고 생동감 있고 쓸모 있는 언어를 사용하길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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